타인에게 말 걸기 (2) archive


짐작과는 다른 일들 

p.161 

우리는 모두 삶에 속는다. 그러나 굳이 속지 않으려고 애쓸 이유도 없다. 유한한 앎을 가지고 무한한 삶을 어떻게 알 것인가. 알려고 하면 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빈처 

p.173 

분명히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사랑을 이루고 나니 이렇게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는 화려한 비탄이라도 있지만 이루어진 사랑은 이렇게 남루한 일상을 남길 뿐인가. 





p.184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열쇠 

p.192 

늘 혼자 되기만을 꿈꾸던 영신이 결혼을 했다는 것은 자신의 해석처럼 정말 미혹이었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때로 그렇게 엄청나게 의외적인 것이다. 





p.213 

밤이 깊어지면서 아파트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적요가 서서히 아파트 단지를 내리누르기 시작한다. 영신은 낮에 고층빌딩을 바라볼 때처럼 피사체를 투과시켜버리는 의미없는 시선으로 베란다 밖을 내려다본다. 





p.215 

 "전자게임은 생각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감각을 적응시키는 거예요. 눈앞에 뭔가가 닥쳐오기 때문에 무조건 쏘는 거라구. 이영신씨처럼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고 의미까지를 저울질하고 그런 넋빠진 짓을 하다가는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인생이라는 모니터에 게임오버 메시지가 나타날 뿐이야. 뭘 선택할까 생각을 깊이 하거나 뒤를 돌아보면 안 돼요. 조금 전까지 사랑했던 것들이 왜 폐기되어야 하는지 생각할 틈 없이 이미 쓰레기로 변한 그 과거를 탄피처럼 질질 흘려가면서, 어느 방향에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는 미확인 물체를 향해 순간적으로 총을 쏘면서 겨우 한 발짝 앞으로 딛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이란 말예요." 







타인에게 말 걸기 

p.228 

얼굴을 가린 손을 밀치고 보니 그녀의 뺨은 눈밑에서 입술 옆까지 세로로 찢어져 있었다. 벌어진 살갗 속에서 피에 젖은 작은 유리조각이 마치 음험한 장소에 숨어 있는 도망자처럼 몸을 웅크린 채 희미하고 수상한 섬광을 내쏘았다. 피가 작은 파장을 이루며 계속 솟아났다. 





p.229 

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일 터인데 나로서는 내게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의 기대에 따른다는 것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p.244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시간이란 하루나 일 주일, 혹은 한 달을 단위로 하여 한 묶음씩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나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단조로움 속에서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다. 만날 수 없어 불안한 애인이나 이루지 못할까봐 조바심나는 희망 따위의,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들을 처음부터 포기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p.249 

 "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말야. 그게 너무 편해. 너하고는 뭐가 잘못되더라도 어쩐지 내 잘못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먼지 속의 나비 

p.264 

 "넌 길음동이나 청량리 안 가? 남자들은 좋아하는 여자랑 자는 것과 창녀랑 자는 것을 꼭 구분하려고 하더라. 창녀랑 자는 것은 남자로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논외로 하고,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자니까 아무하고나 자는 건 아니라는 거야? 난 그런 구별은 안 해." 







해설 
나르시시즘과 사랑의 탈낭만화 

p.344 

이중주에 등장하는 모녀 정순과 인혜는 가정의 행복을 위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외로운 존재로 남은 여성 이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기적인 남편 때문에 굴욕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정순, 개인적 욕구를 포기하고 성실히 주부의 역할을 했으나 남편의 배신으로 결혼의 파경을 맞은 인혜, 그들은 여성적 삶의 규범에 순응한 결과로 상처를 입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숙명처럼 견딘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각자 외로운 처지가 되어 공감을 나누는 그들 모녀의 이야기에서는 여성들에게 세습되고 있는 슬픔의 애처로운 화음이 들려온다. 





p.348 

연미와 유미의 이야기는 강한 연미의 약함을, 약한 유미의 강함을 들추어 보이면서 '혼자임'의 행복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혼자가 될 수 있다면 결혼은 행복한 것이다"라는 역설은 타인에 대한 구차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은희경적 여성들의 심리를 명확히 나타낸다.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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